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라비 왕조 (문단 편집) ==== 왕조의 붕괴 ==== 이때까지만 해도 개혁군주로서 팔라비 2세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1972년 오일쇼크 직전 당시 이란의 1인당 국민소득은 570달러였는데 혁명직전인 1977년 당시 이란의 1인당 국민소득은 2315달러로 약 4.2배 가량 늘어났다. 동시기 한국은 1970년 270달러, 1975년 800달러 선이었고 80년대 중반에 가서야 2000달러 중반대를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들어 [[오일 쇼크]]가 가라앉고 유가가 안정되자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겼으며, 또한 오일쇼크로 경제력이 급속히 향상되었으나 석유수출로 얻은 이득이 소수의 특권층과 부유층들에게 쏠리고 이란의 산업부문은 갑자기 높아진 소비력을 감당하기에 모자라서 물자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발생했으며 또한 물가도 급속히 상승하여 농촌과 중소상인들이 몰락의 길로 걷고 이는 도시 빈곤층의 증가로 이어지며 되려 팔라비 2세에 대한 반발을 늘렸다. 물론 타 걸프왕국들도 소수계층에게 석유수출로 얻은 이익을 독점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럼에도 (외국인 노동자를 제외한) 서민들도 어느정도 부유하게 먹고살 정도는 되었는데 이란은 타 걸프만 국가에 비해 인구가 몇배 이상은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선심성 정책을 내놓는다 한들 그 수준은 타 걸프만 국가들에게 훨씬 못미쳤다. 결국 이슬람 원리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이 모여서 파업과 시위가 빈발했다. 설상가상으로 1974년에 이미 프랑스 의료진에게서 임파암과 비장암 선고를 받은 팔라비 2세는[* 임파암과 비장암 외에 이란 혁명으로 축출당하고 사망하기 직전에 간암까지 앓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건강 문제 때문에 급변하는 시국에 대해 적절한 대응이 어려웠다. 아예 1978년 봄부터는 공식 석상에 나서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으며, [[헝가리 인민공화국|헝가리]]와 [[불가리아 인민공화국|불가리아]] 등 동유럽 국가 방문 계획도 취소되었다. 암의 진행을 늦추려고 프랑스 의료진이 처방한 항암제는 우울감과 사고력 저하를 불러일으켜, 격변기에 대한 상황 대응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결국 1978년 초부터 발생하던 반군주제 시위는 1978년 8월 19일 아바단에서 일어난 [[https://en.wikipedia.org/wiki/Cinema_Rex_fire|렉스 극장 방화사건]][* 최소 420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팔라비 왕조의 비밀경찰 사바크(SAVAK)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시위가 확대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방화범의 정체는 이슬람주의자 또는 사바크라는 설이 있으며, 범인의 정체는 혁명 후에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범인 미상(Unknown)으로 표기한다). 만화 [[페르세폴리스]]에서도 이 사건을 잠시 언급한다.], 9월 8일 검은 금요일 사태로 88명의 사망자가 나와 시위는 더 악화되었다. 팔라비 2세는 골람레자 아자리 장군을 수상에 임명하여 군사정권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는 한편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러 개혁조치를 약속했으나,[* 당시 팔라비 2세는 민주적 다당제 선거 실시와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로의 개헌, 언론 자유 허용, 정치범 사면, 사바크 해체, 국내 실업자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 등 각종 개혁안을 발표했지만 대다수의 이란 국민들과 근황파를 제외한 나머지 이란내 정파 세력들은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시위가 악화되던 와중에 1979년 1월 6일 서방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이 [[https://en.wikipedia.org/wiki/Guadeloupe_Conference|과들루프 합의]]로 이란 사태 불개입과 팔라비 2세의 퇴진을 종용하여 사실상 팔라비 왕조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샤푸르 바크티야르를 총리로 임명하여 퇴위를 결정하고, 암 치료를 핑계로 망명하게 된다. 호메이니는 2월 1일에 15년 만에 귀국을 완수하여, 이슬람 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팔라비 2세가 임명한 마지막 총리인 샤푸르 바크티야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정부 구성과 정국안정을 위한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호메이니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고 바크티야르의 무조건적인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하며 바크티야르에게 맞섰다. 이러한 호메이니의 즉각적 사퇴를 수용하지 않았던 바크티야르 내각과, 황실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위대 및 이란 육군 공수부대와 내무부 보안군이 호메이니 지지를 표명한 육군 내부의 반정부세력과 전투를 벌이다가 2월 11일에 제압되었다. 총리와 친위대 대장들이 체포되어 2월 13일 공식적으로 바크티야르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완전히 이슬람 혁명 위원회가 이란을 장악하고 이들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이란 혁명]]은 종료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